[90호] 잊는 순간 반복된다
잊는 순간 반복된다
좋아하던 책의 말미에 '산다는 건 조금씩 잊어가는 것'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추억, 헤어진 연인에게 받은 상처, 떠나간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 오래된 사진이 색이 바래 사각 프레임 속의 순간이 점점 희미해지듯, 당시 절대 잊지 않겠노라 마음먹었던 그 순간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색이 바랜 사진처럼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다. 어쩔 수 없다. 산다는 건 조금씩 잊어가는 것이니깐.
작년 한 해는 그 어느 때보다 안타까운 사건 사고가 많은 해였다. 자연재해, 인재 가릴 것 없이 국내외적으로 비보가 끊이지 않았다. 국가적으로도 많은 행사와 축제들을 취소하는 등, 온 나라가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1년을 보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중 단언 300명가량의 사망자를 낸 세월호 침몰 참사는 꽃 피지 못한 어린 학생들의 사망비율이 높았던 만큼 가장 안타까웠던 사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세월호가 정치적인 싸움의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어, 유가족 및 관련 정치인들에 강한 비난을 내뱉는 이들도 있다.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힘없는 아이들이 죽었고, 이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모든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이 사고는 당시 전 국민의 가슴을 울렸고 아직도 진행형이다. 1년이 지난 오늘까지 국민은 '세월호 잊지 맙시다.'라는 문구와 함께 밝혀지지 않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1년 전 그 날을 기억하려 하고 있다.
그에 비해 작년 초에 있었던 경주 리조트 붕괴 사고는 기억하는가. 이 사고 또한 고등학교에서 막 졸업한 어린 학생들이 죽었고,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세월호 참사의 영향이 큰 탓인지 벌써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고, 사고에 관해 있었던 각종 의혹과 보상 문제가 어떻게 해결됐는지는 이미 관심 밖이다. 얼마 전 같은 건설사의 호텔에서 또 다른 사고가 일어나 많은 논란이 생길 것으로 예측됐으나, 그렇지도 않았다. 임 병장 총기 난사 사건과 윤 일병 자살사건 같은 군대 내 사건 사고 또한, 당시 군대 개혁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군대 사고가 일어나고 있으며, 당시에나 번쩍 변화의 바람이 불었을 뿐 달라진 것은 없다. 윤 일병의 죽음은 안타까운 해프닝으로 묻힌 듯하다.
한국인의 부정적인 기질 중, 냄비근성이라는 말이 있다. 빨리 끓었다 빨리 식는 냄비와 같이,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당시에는 애국자라도 된 마냥 뜨겁게 불타오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식어버린다. 그리고 곧 잊어버린다. 그 가장 큰 사례는 태안 기름 유출 사고였다. 2007년 태안 앞바다서 유출된 1만5백 톤의 기름은 인근 해안을 오염시키며,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모두 망쳐놓았다. 당시 130만 명이 넘는 국민은 자원봉사를 자청하며 태안으로 가 정화운동에 참여하며 유례없는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해냈다. 하지만 회복까지 최소 20년은 걸린다는 태안 앞바다는 4개월이나 지났을까, 사람들의 발길이 모두 끊겨버렸다. 관심에서 멀어진 태안 주민들은 그 이후에도 고독한 싸움을 이어갔다. 이 사건은 세월호만큼 많은 사상자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국민의 관심과 움직임은 그만큼 컸던 사고였다. 하지만 채 1년이 안 되어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져 버렸으며, 한국인의 냄비근성이 가장 잘 드러난 사건으로 남아있다. '세월호 잊지 맙시다'… 우리는 언제까지 더 세월호를 기억할까
산다는 건 조금씩 잊어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어선 안 된다. 지난 한 해 있었던 안타까운 사건 사고들... 그 순간들이 만든 눈물과 상처가 시간이라는 망각 약에 쉽게 마르고 치유되어선 안 된다. 바로잡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 인재(人災)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정부에게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국민이 이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재발 방지를 위해 아무리 훌륭한 법안이 통과될지라도, 국민이 관심을 버리고, 감시자 역할을 자청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세월호 참사, 언제가 될지 모른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죽음은 한 번으로 족하다. 잊지 말자. 우리가 잊는 순간 그 죽음의 숭고한 의미는 사라져버린다.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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